싫은데 이유 있던가? 없다. 싫으면 만사가 귀찮고 어떤 행위나 과정에서도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아니 않는다. 이것은 교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단 내 마음에 싫음이 뱀 똬리를 틀게 되면 예배도 모임도 헌신도 딴 나라 이야기가 된다. 본인 스스로 은혜를 버려 버린다. 이게 얼마나 고약하고 심각한가 하면 그 사람이 싫으면 천국도 안 간다는 말까지 있다.

 

아무리 은혜를 체험했다고 말하고 성령님을 경험했어도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다 보니 은혜를 받고도 바로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회를 하다보면 어떤 일보다 사람 달래고 설득하고 위로하고 기다리는 것에 상당량의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그만큼 인내해야 될 과정이 많은 게다. 그런데 그게 목회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신앙이 많음을 본다. 우리는 말씀을 기본적으로 안다고 여기면서도 실제 신앙됨의 기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음을 모른다. 예배도 내 마음이 언짢으면 자리를 비우기 일쑤다. 섬겨오던 사역도 상황 때문이든 사람 때문이든 내 안에 쌓인 감정의 골에 따라 결국에는 차갑게 놓아 버린다. 그런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다. 부끄럽지만 우리도 그러지 않았던가.

 

세상일도 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 순간은 영웅이 된 듯 하고 사이다 발언으로 주변 사람들의 일시적인 추임새가 있겠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낙오되거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가 쉽다. 그만큼 손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말을 아낀다. 때로는 답답해 보일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고 자리를 보장해 주며 공동체의 와해를 사전에 막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신앙생활은 이보다 수준이 훨씬 높다. 말할 수 있어도 말하지 않음과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러지 않아야 함 등이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생존과 서로 간의 상생을 위해서 일 때가 많지만,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신앙과 사역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자기희생을 통한 헌신은 그 이유와 목적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루기 위해 신자는 사랑에 매인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역설의 기쁨으로 걸어간다.

 

힘들고 어려우면 중간에라도 그만둘 수 있다. 하기 싫다는데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겠나? 이것을 근본적으로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는 코람데오 신앙은 그 출발점이 다르고 과정과 결과도 세상 이치와 같지 않다. 나의 섬김은 내가 원함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셨고 약한 나를 부르셨고 무능한 나를 세우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곳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고 밀치심이다.

 

이것이 우리 편에서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나의 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낮은 자로서 헌신의 삶을 사는 거다. 비록 섬김의 과정 속에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즐비할지라도 내 자존감이나 옳음, 당위성마저 나의 면류관을 벗어 십자가 앞에 던져버리는 이유는 날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사랑에 매여 신자는 순리를 따라 희생의 자리가 갈무리될 때까지 섬긴다. 사랑 앞에서 이치와 논리는 무장해제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이기게 한다. 신자의 신앙, 그 삶과 사역은 모두 사랑에서 나오는 헌신이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이것을 모르거나 생각을 거부하면서 내 감정이 내키는 대로 사명을 저울질한다. 참아봤지만 내가 힘드니까 이제는 누가 뭐래도 놓아 버린다. 그럴 수 있다. 충분히 그럴만 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문제는 환경이나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발로를 잃어버린 나에게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은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사람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셨고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로부터는 저주와 배반을 당하시면서 까지 이런 자들을 위해 결국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자기 사명을 다 이루셨다. 순종과 희생의 이유는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 때문에 울고 웃고 밀치심과 끌어당김을 당한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에서도 기뻐한다. 세상이 모르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그 사랑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남 말할 필요가 없다. 자기 손톱 밑에 들어간 작은 가시가 세상에서 제일 아프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이 제일 힘들다. 그게 전부다. 당시로서는 그것밖에 안 보인다. 그러나 이럴 때에도 신자는 우리 때문에 온갖 모욕을 당하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바보같이 또 그 자리에 선다. 남이 뭐라 하든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게 전부다. 날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신자는 오늘도 여기 저기 멍이 든 채로 선다. 하지만 거기에는 남이 모르는 비밀한 위로하심과 함께하심, 그리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오늘도 그 사랑에 기댄다.

 

항간에 큰 감동을 주었던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이 막을 내렸지만 나는 여태 시청을 못했다. 그래서 뒤늦게 간간이 조금씩 찾아본다. 이제 중간을 지나고 있다. 거기에서 마음에 와 닿는 장면이 있더라. 유진 초이(이병헌)가 고애신(김태리)을 데리고 먼 바다로 간다그녀가 원했기 때문이다. 멀리 수평선을 보면서 모닷불의 사랑은 깊어간다. 그때 유진 초이의 독백이 나온다. 바다 때문에 먼 길을 달려왔고 보고자 했던 바다를 보고 있는데도 그는 바다가 안 보인단다. 그저 자기가 건 낸 것을 맛나게 먹고 있는 그녀만 보인다더라.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지다. 이병헌은 연기자로서 복이 많은 사람이다. 이 드라마에서만 봐도 멋진 앵글이나 카메라 워크, 역사성과 유머 그리고 애틋한 사랑까지 잘 버물어진 플롯, 특히 심쿵하게 만드는 대사들은 충분한 매력 포인트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 다른 것은 안 보인다. 사랑하는 아들이 멀리서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어미는 한 눈에 바로 알아본다. 예수님께 사랑받던 요한이 그물질하던 배 위에서 저만큼 떨어진 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알아본 것처럼 말이다 신자가 감내하는 헌신 속에서 당하는 상처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쓰라리다. 특별히 사람 때문에 당하는 시험은 남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은혜 받은 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함께 하면서 맡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다.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 자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사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보이기 때문이다. 신자가 오늘도 등신같이 바보같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아니 오히려 상처만 더 깊이 파일 뿐임에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 사랑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눈에는 누가 보이는 걸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은 결국에는 순종을 선택하고 결단하는 용기다. 오죽했으면 성경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까지 했을까. 여기서 제사는 종교 행위의 모든 것을 내포한다. 흔히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모든 거룩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예배, 말씀, 기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신앙의 핵심보다도 삶 속에서의 순종을 먼저 원하시고 살펴보신다는 것이 놀랍기 그지없다. 하긴 영과 진리로 예배가 드려지고 말씀이 깨달아지며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할 때 어찌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나. 섬기는 중에 각 종 시험을 당하는 본인들은 얼마나 힘들까? 그러나 그럼에도 누군가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교회 리더십의 마지막 권면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의 신념만을 붙잡기로 결단한다(감사하게도 결국엔 순종한다). 나는 어떨까? 내가 그 입장이라면 무엇을 선택하고 결단하게 될까? 주님을 본받아 끝까지 나를 부인할 수 있을까? 정답을 말하기는 쉬워도 내가 당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말씀대로의  확인은 이 모든 입장 위에 있는 기준점이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따라 순종함에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그 사랑 안에 깊이 거하고 있는 걸까? 문제를 만나고 시험을 당하게 되면 누구나 시야가 좁아진다. 그런 만큼 자신의 입장에 매몰되고 갇히게 된다. 나와 우리를 향하신 성령님의 세밀한 음성을 놓치게 된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모든 근원의 시작이며 끝이시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이끄시며 끝을 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오늘도 신자로서 우리는 고백해야 할 것과 해야 할 일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미래에는 심판이 있다. 한 사람은 원수의 목전에서 존귀함을 받을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잊지 말자. 우리는 그 일을 행하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오늘도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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